부처님이 사위국 기원정사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날 부처님은 까마귀와 돼지, 노새와 소의 비유를 들어
수행자들을 가르쳤다.
"어떤 사람이 까마귀와 같은 수행자인가".
그는 한적한 곳에 있으면서 음욕을 익혀 온갖 나쁜 짓을
행하다가 문득 스스로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며 자기가
한 일을 모두 남에게 말한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남들이 이 사실을 알고 조롱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유하자면 이렇다.
즉 까마귀는 배고픔에 못 이겨 고통 받다가 더러운 것을
먹고는 곧 주둥이를 닦는 것과 같다.
그것은 다른 새가 '이 까마귀는 더러운 것을 먹었다'고
비난할까 두려워해서다.
수행자가 나쁜 짓을 하고 그 허물을 남에게 말하는 것도
그와 같다.
어떤 사람이 돼지와 같은 수행자인가.
그는 한적한 곳에 있으면서 음욕을 익혀 온갖 나쁜 짓을 하고도
스스로 뉘우치거나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그는 도리어 남에게 '나는 다섯 가지 향락을 누리는데
저들은 그러지 못한다'고 자랑까지 한다.
그것은 비유하자면 돼지가 항상 더러운 것을 먹고
더러운 곳에 누워 있으면서 다른 돼지들에게 뽐내는 것과 같다.
수행자가 스스로 음욕을 익혀 나쁜 짓을 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도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노새와 같은 수행자인가.
그는 수염과 머리를 깎고 불법을 배우되 감관이 안정되지 못하여
육근으로 육경을 대하면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낸다.
그래서 위의와 법도가 없고 걸음걸이와 행동거지가
모두 계율에 어긋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보면 '아, 이 사람은 겉모습만 수행자 같구나'
하고 조롱한다.
그러면 그는 '나도 수행자다, 나도 수행자다' 하고 강변한다.
그것은 마치 노새가 소떼 속에 들어가 스스로 일컬어
'나도 소다, 나도 소다'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노새는 귀를 보아도 소도 아니고 뿔이나 꼬리도
소와 닮지 않았으니, 소들은 그를 뿔로 받거나 발로 밟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이 소와 같은 수행자인가.
그는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견고한 믿음으로
집을 나와 불법을 배운다.
그는 모든 감관이 안정되어 六境을 대하되 감관을 잘 보호한다.
그래서 그의 행동은 위의와 법도가 있고 걸음걸이와 행동거지가
모두 계율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멀리서도 그가 오는 것을 보면 '잘 오시오, 친구여.
제때에 공양을 받아 모자람은 없었는지요' 하고 인사를 한다.
그것은 마치 좋은 소가 소떼 속에 들어가 스스로 일컬어
'나는 소다'라고 스스로 일컬으면 다른 소들은 털과 꼬리와 뿔과
소리가 같은 것을 알고 서로 친근하게 다가와서
몸을 부비고 핥아주는 것고 같다."
- 증일아함 제7권〈화멸품火滅品〉-
돌아보면 요즘 우리 주변에도 이 경에서 지적한
'타락한 수행자'가 없지 않다.
역사적으로도 이런 사례가 많았다.
《고려사》나《조선왕조실록》등에는
타락한 수행자의 기록이 자주 나타난다.
조선시대의 야사를 모아놓은《용재총화》에는
당취승(黨聚僧)에 관한 언급도 보인다.
당취승이란 타락한 수행자들이 아예 무리를 지어서 돌아다니며
행패를 부렸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어디 불교뿐이겠는가.
다른 종교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불법이 지금까지 유지돼 온 것은 '타락한 돼지'같은 수행자보다는
'점잖은 소'같은 수행자가 절대다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들은 더욱 존경을 받았다.
요즘 한국불교도 '점잖은 소'같은 분들이 훨씬 더 많다.
몇몇 타락한 수행자로 인해 훌륭한 수행자마저 사시(斜視)로 볼 일이 아니다.
'지심귀명래, 상주일체 승가야중!'
- 날마다 읽는 부처님 말씀에서 -
# by | 2008/10/09 14:11 | 불교(佛敎)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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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야사를 모아놓은《용재총화》에는
당취승(黨聚僧)에 관한 언급도 보인다.